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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 (12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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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항은 1209년에 태어난 고려 무신정권기 인물로, 최우의 서자이다. 승려 생활을 하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속세로 돌아와 정권을 승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항몽 정책을 이어받아 몽골에 강경하게 대처했으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8년간 집권하다 1257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진평공'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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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 (120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최항
원래 이름최항(崔沆)
큰제목진평공
다른 이름만전(萬全)
별명법우(法祐)
출생일1209년
출생지금천군 우봉(金川郡 牛峰)
사망일1257년 5월 17일
사망지미상
매장지미상
배우자레이디 최(Lady Ch'oe)
레이디 조(Lady Jo)
자녀최의(崔竩)
부친최우(崔瑀)
모친서련방(瑞連房)
국가고려
대수3
직책교정별감
임기1249년 ~ 1257년
전임최우(崔瑀)
후임최의(崔竩)
묘호미상
시호미상
종교불교(佛敎)
가문우봉(牛峯)
왕조고려(高麗)
목록무신정권 집권자
군사 경력
지휘고려군
계급상장군
참전고려-몽골 전쟁
고유 정보
로마자 표기Choe Hang
한글최항
한자崔沆
rr표기Choe Hang
mr표기Ch'oe Hang
가나さい こう

2. 생애

1209년 최우의 서자로 태어났다. 본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희종 5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우봉 최씨이고, 처음 이름은 만전이었다.[4] 쌍봉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 1248년 아버지 최우가 병에 걸리자 속세로 돌아와 '항'으로 개명했다. 임익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에게 예법을 배웠으며,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랐다.

아버지 최우 생전에 좌우위상호군·호부상서를 지냈고, 추밀원지주사가 되었으며, 최우로부터 사병 500명을 받았다. 1249년 최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장악하여 은청광록대부로 승진하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이병이부상서·어사대부·태자빈객을 거쳐 동서북면병마사를 겸했고, 교정별감에 취임했다. 조부 최충헌의 초상을 창복사에, 아버지 최우의 초상을 선원사에 옮기는 데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최항은 의심이 많고 참소를 즐겼으며, 충언을 들어도 이를 맹신했다. 타인을 비방하는 말을 잘 믿고 밀고자에게 상을 주었으며, 고발 받은 자는 엄벌에 처했다.[4] 1250년 전 추밀원부사 주숙과 그 일족을 죽였다. 1251년 지추밀원사 민희와 추밀원부사 김경손을 추방하고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살해했다. 좌승선 최현·장군 김안·지유 정홍유 등을 유배시키고, 참지정사 정안을 죽였다. 각 주현의 세금을 감면하고, 여러 도의 문지기를 줄여 인건비를 절약하여 인망을 얻었다. 아버지 최우의 진양공 식읍, 대장경 판각과 강화도 축성 및 대묘 창건 등의 공을 포상하는 것은 모두 사양했다.

1252년 몽골의 다루가치 등이 고종에게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와 사신을 맞이하도록 요구하자, 최항은 신안공 이현을 대신 보냈다. 1253년 몽골이 침공하여 고종에게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독촉하자, 김준 등이 태자를 보내 몽골군을 위무하려 제안했지만, 최항은 끝까지 반대했다.

몽골이 강화도 출도를 요구하자, 최항은 승천부에 신궁전을 지어 이에 응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원종에게 다루가치에 강력히 반대하게 하고, 왕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신안공 이현을 보내 대신 다루가치들을 대면시키는 등 아버지 최우의 항몽 정책을 계승하며 강경책을 관철했다. 1257년 윤4월, 집권 8년 만에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갑자기 병사했다. 일설에는 김준이 독살했다는 설이 있으나 유력하지 않다.

사후 "진평공"으로 추봉되었다.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 적자가 없어, 송서의 비(婢)가 낳은 최의가 뒤를 이었다. 최의가 살해당하면서 최씨정권이 붕괴되자, 최항의 거처는 철거되었고, 그 토지는 집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졌다. 1963년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의 야산에서 최항 묘지 터가 발견되었고, 묘소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청자 동화 연화문 표형 주자』가 출토되었다. 대한민국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최우의 서자로 어머니는 창기(娼妓) 서련방이며[6], 1209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우봉(牛峯)이며, 처음 이름은 만전(萬全)이었다.[4]

송광사에서 형인 만종과 함께 승려가 되어 쌍봉사 주지로 있다가 1248년 고종 35년에 아버지 최우가 병이 들자 속세로 돌아와 항으로 개명하였다. 임익(任翊)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權韙)에게 예를 배웠으며, 당시 고려 시대에 아버지나 조부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품계를 받을 수 있었던 '음서제도'로 관직에 올랐다.

2. 2. 관료 생활과 권력 승계

아버지 최우 생전에 좌우위상호군, 호부상서를 지냈다. 추밀원 지주사가 되어 아버지 최우로부터 가병 500명을 받았다.[2]

1249년 최우가 죽은 뒤 정권을 인수하여 은청광록대부로 승진,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태자빈객을 거쳐 병부상서가 되어 동북면병마사를 겸하였다. 이어 동서북면을 총괄하는 교정별감에 취임한다.[2]

1248년 아버지 최우가 병에 걸리자 속세로 돌아와 '항'으로 개명하고, 임익에게 글을 배우고 권위에게 예법을 배웠다. 당시 고려에서는 아버지나 조부가 고관에 오르거나 국가에 훈공을 세운 경우, 그 자손에게 특별히 품계를 수여하는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랐다.[4]

조부 최충헌의 초상을 창복사에, 아버지 최우의 초상을 선원사에 옮기는 데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2. 3. 권력 강화와 공포 정치

최항은 의심이 많고 참소를 즐겼으며, 충언을 들어도 사람을 조사하지 않고 이를 맹신하였다. 타인을 비방하는 말을 잘 믿고, 비열한 감정으로 밀고하는 자에게도 상을 주었으며, 고발을 받은 자는 용서없이 쫓아가 엄벌에 처했다.[4] 1249년 김경손의 조카인 김미(金敉)가 최항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경손에게 밀지를 보내 최항을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으나,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한 김경손은 최항에게 밀고하여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최항은 김미를 삭방출가시키고 김경손을 백령도에 유배보냈다. 1250년 전추밀원부사(前樞密院副使) 주숙(周肅) 등을 죽였으며, 무고(誣告)를 듣고도 조사하지 않고 맹신하였다.[4] 1251년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하고, 민희(閔曦)와 김경손을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죽였다. 이어 최환(崔峘), 김안(金安), 정홍유(鄭洪裕) 등을 유배시키고, 정안(鄭晏)을 죽였다.[4]

1250년 3월에는 주숙(周肅)·김효정(金孝靖) 등을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였으며, 최종필(崔宗弼), 나주 부사 이균 등을 귀양 보냈다. 그는 최우에 의해 추방된 김미(Kim Mi)의 이전 지지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민희(Min Hŭi)와 김경손 등 많은 인기 있는 정부 인물들을 유배 보냈다.[3]

2. 4. 대몽 항쟁과 외교

1252년 몽골의 사신 다가(多可) 등이 고려에 들어왔다. 고종에게 강화도에서 나와 육지에서 직접 사신을 맞이하라는 요구에 모든 신하들이 동의했으나, 최항은 홀로 반대하며 신안공(新安公) 전(佺)을 대신 보냈다.[3]

1253년 몽골은 이를 구실로 야굴(也窟)과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입, 고종에게 강화에서 나와 환도할 것을 독촉했다. 영녕공(永寧公) 준(綧) 등이 태자를 보내 몽골군을 달래자고 제안했으나, 최항은 끝까지 거절했다.[3]

몽골이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자, 최항은 승천부에 신궁전을 지어 이에 응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원종에게 다루가치에 강력히 반대할 것을 주장했다.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 등이 왕에게 직접 나와 맞이할 것을 요구하자, 왕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왕족인 신안공 이현을 보내 대신 대면시키는 등 아버지 최우의 대몽 항쟁 정책을 계승, 강경책을 유지했다.

2. 5. 최후

1252년 몽골에서 파견된 사신 다가(多可) 등이 고려 고종에게 직접 개경으로 나와 맞이할 것을 요구하자, 왕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종실인 신안공 왕전(王佺)을 보내어 대신 몽골 사신들을 대면하게 하는 등 아버지 최우의 항몽 정책을 계승하여 강경책을 폈다.[3] 1253년 몽골이 고려에 대군을 보내 고종에게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독촉하기 위해 침공하자, 김준 등이 태자를 보내 몽골군을 위무할 것을 제안했지만, 끝까지 반대했다.

몽골이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자, 최항은 승천부에 신궁전을 지어 이에 응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원종에게 요청하여 다루가치에 강력히 반대했다. 몽골에서 파견된 다루가치 등이 왕에게 직접 개경으로 나와 맞이할 것을 요구하자, 왕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왕족인 신안공 이현을 보내 대신 다루가치들을 대면시키는 등 아버지 최우의 항몽 정책을 계승하며 강경책을 관철했다.[3] 1257년 윤4월, 집권 8년 만에 5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갑자기 병사했다. 일설에는 김준이 독을 넣어 살해했다는 설이 있으나 유력하지 않다.[3]

사후 "진평공"으로 추봉되었다.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 적자가 없어, 송서의 여종이 낳은 최의가 뒤를 이었다. 최의가 살해당하면서 최씨정권이 붕괴되자, 생전 최항의 거처는 철거되었고, 그 토지는 집 없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졌다. 1963년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의 야산에서 최항 묘지 터가 발견되었고, 그의 묘소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청자 동화 연화문 표형 주자』가 출토되었다. 대한민국 국보 제133호로 지정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최원호
증조모진강국대부인 유씨
종조부최충수
대고모최씨
내종숙박진재
대고모최씨
대고부 겸 증외종조부유숙
조부최충헌
아버지최우
어머니정씨
누이최씨
매부김약선
외조카딸정순왕후 (원종의 비, 충렬왕의 어머니)
생모서련방 - 창기 출신
만종 (승려)
정실최씨 - 최온의 딸
계실조씨 - 조계순의 딸
이름 미상 - 송서의 여종
아들최의
심경 - 최항이 죽은 후 최의의 첩이 됨


4. 평가

최항은 집권 초기에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가혹한 관리들을 처벌하여 민심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무고를 맹신하여 여러 사람을 살상하는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2]

4. 1. 긍정적 평가

집권 초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魚梁, 선박세)을 면제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교정도감의 수획원(收獲員)들을 소환, 처벌, 해임하여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교정별감 수획원들의 횡포가 크자 안찰사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등 인심을 얻으려고 힘썼다.[1]

4. 2. 부정적 평가

집권 초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魚梁, 船舶稅)을 면제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교정도감의 수획원들을 소환, 처벌, 해임하여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교정별감 수획원들의 횡포가 크자 안찰사(按察使)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등 인심을 얻으려고 힘썼으나 점차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였다. 또한 무고(誣告)를 맹신하여 여러 사람을 살상하였다.[2]

5. 기타

2012년 MBC TV 드라마 《무신》에서 백도빈이 최항을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최항 崔沆 a(1209 ~ 1257) http://www.encyber.c[...]
[2] 서적 Generals and Scholars
[3] 웹사이트 Ch'oe Hang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4-08-14
[4] 웹사이트 최항 崔沆 a(1209 ~ 1257) http://www.encyber.c[...]
[5] 백과사전 최항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
[6] 기록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최충헌 부 최이, "怡無適子, 嬖妓瑞蓮房, 生二男萬宗·萬全."
[7] 웹사이트 http://yoksa.ak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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